이종호 서울대 반도체연구소장이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 후보자로 지명됐다. ‘기술주권’ 시대에 전략기술을 키우기 위한 새 정부의 포석이다. 다만 10여 개의 전략기술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반도체 외에도 종합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외교안보까지 포함한 국가의 생존과 성장 동력 확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실제 미국·중국·일본·유럽 등은 전략기술 육성을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전략기술 퍼스트’ 흐름이다. 하지만 우리는 국가 간 협력을 이끌어낼 지렛대 역할을 할 전략기술이 반도체·배터리(2차전지)를 빼면 사실상 찾기 힘들다. 국가 연구개발(R&D) 시스템의 대혁신, 인재 양성, 선제적 규제 혁신, 산학연 협력 체계와 특허 전략 재구축, 국제 협력, 해외 인수합병(M&A)이 필요한 이유다. 9~12월 정기국회에서 이뤄질 정부 조직 개편에서 과학기술디지털부총리 도입도 ‘과학기술 선도 국가’로 가기 위해 긴요하다. 정상조 국가지식재산위원장은 “초격차를 추구할 수 있는 전략기술을 늘리고 미래 전략기술 육성에 팔을 걷어붙여야 한다”며 국가적 역량 결집을 호소했다.
◇반도체·배터리 외 초격차 기술 키워야=과기정통부는 새정부 국정철학에 맞춰 반도체·디스플레이·2차전지·5G·6G·수소 외 차세대 원전까지 넣어 초격차를 추구할 수 있는 전략기술로 본다.
하지만 “미국 등 과학기술 선도국에서 우리에게 협력을 요청할 분야로 실상 반도체를 빼면 뭐가 있느냐(안준모 고려대 교수)” “경제안보가 중요한 기술주권 시대에 핵심 지렛대 기술이 태부족이다(임혜숙 과기정통부 장관)”는 지적은 뼈아프다. 더욱이 반도체도 강점인 메모리보다 시장 규모가 2배 이상 큰 비메모리(시스템 반도체와 파운드리)는 후발주자이고, 배터리도 중국·일본 등과 거센 경쟁을 헤쳐가야 한다. 정보기술(IT)보다 시장이 10배가량 큰 바이오의 경우 중국은 복제약 제조 단계를 넘어 신약 개발 등에 대거 투자하며 우리를 추월한 지 오래다. 초격차 기술을 과감하게 키우지 않는 한 5~10년 뒤 국가의 장래를 장담할 수 없는 게 현실인 것이다.
◇격화되는 글로벌 ‘초격차 기술’ 전쟁=반도체·디스플레이는 우리 수출 비중의 20% 이상으로 AI 등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기반 기술이다. 미국의 어마어마한 반도체 투자와 중국의 반도체 굴기, 일본과 유럽연합(EU)의 투자 확대 기세도 우리를 위협하는 요소다. 반도체 장비 톱10은 일본·미국·유럽이 차지하고 반도체 소재는 일본이 세계 50% 이상을 점유하는 게 현실이다. 박재근 한국반도체디스플레이기술학회장(한양대 교수)은 “AI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R&D를 늘리고 인력 양성과 인프라 확대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전기차의 부상으로 부각된 2차전지의 경쟁도 치열하다. 리튬이온전지 시장의 경우 2025년 메모리 반도체 시장 규모를 넘을 것(SNE리서치)으로 전망된다. 2차전지는 한중일이 주도하는 시장으로 에너지 밀도 등 전지 제조 기술은 비슷하나 우리는 생산성, 중국은 가격에서 우위를 보인다. 핵심 원료·소재의 해외 공급망 관리와 자립화, 차세대 전지 조기 상용화가 필요하다.
5G·6G는 데이터 사용 급증과 자율주행, 디지털 의료 등을 뒷받침할 기술이다. 다만 미국·일본 등에 대한 단말, 핵심 부품 의존도가 높다. 천세창 산업통상자원부 산업융합혁신촉진 옴부즈만은 “오픈랜(무선 접속망 인터페이스와 소프트웨어의 개방형 표준 구축)과 6G 상용화에 대비한 표준 선점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수소는 탄소 중립과 에너지 안보의 핵심 기술로 수소차·연료전지(활용)는 세계 최고 수준이나 수소 생산 기술은 열세다. 하성규 한양대 교수는 “아직은 산업화 초기 단계로 청정수소 생산부터 이송·저장·활용 등 전 주기 기술 경쟁력 확보로 시장을 선점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현 정부에서는 외면받았던 차세대 원전의 경쟁 또한 본격화하고 있다. 미국·러시아·중국·영국 등 15개국에서 약 70종이 넘는 소형모듈원자로(SMR) 노형을 개발 중이다. 차세대 원전에 꽂힌 빌 게이츠가 2019년 “한국이 탄소 중립을 하려면 원자력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는데, 안전성·경제성을 높일 기술 개발이 필요하다.
◇'제로 베이스'에서 파괴적 혁신 나서야=미국은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OSTP)에 안보 전략 기능을 강화하고 국립과학재단(NSF) 기술혁신국과 국무부 기술협력국 신설을 추진 중이다. 영국과 일본은 각각 총리실 과학기술전략실(OSTS)과 경제안보상을 신설했다. 이광형 KAIST 총장은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공약한 ‘민관 과학기술위원회’를 일종의 한국판 ‘OSTP’로 격상하고 기술안보위원회를 신설할 필요가 있다”고 힘줘 말했다. 여기에 과기디지털부총리 체제가 도입되면 금상첨화다. 범부처 차원에서 산학연과 함께 로드맵 수립, R&D 투자, 국제 협력, 표준 선점, 공급망 관리, 인력 양성, 제도 혁신에 나서야 한다.
윤 당선인은 과학기술 5대 강국 도약 차원에서 정부 출연 연구기관에 전략기술 연구 플랫폼을 구축하고 총리실 산하 신흥안보위원회 설치를 내건 바 있다. 안철수 인수위원장도 과기부총리 신설, 국가미래전략산업지원특별법 제정, 주요 5개국(G5) 도약을 제시했다.
문제는 담대한 비전과 실행력이다. 과학기술 컨트롤타워 구축과 함께 전략기술에 대한 정부의 마중물 투자를 민간투자 확대로 이어지게 해야 한다. R&D 전 주기에 걸쳐 민간이 참여하는 R&D 협의체도 구성해야 한다. EU는 기업 중심 산학연 협의체를 가동한다. 국양 대구경북과학기술원(DGIST) 총장은 “민간 주도로 R&D 기획의 틀을 바꾸되 정부는 원천기술 투자와 생태계 구축에 신경을 써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수 전략기술 중 일부는 R&D 예비 타당성 검토의 패스트트랙도 필요하다. 예타 통과 5년 이상 사업은 중간 평가를 통해 변경을 허용해야 한다. R&D와 시설 투자에 대한 세제 지원, 실증 사업 확대, 정부 조달 시장 우선 구매 등도 늘려야 한다. 금지된 것만 나열하는 네거티브 규제로의 대전환도 과제다. 김복철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이사장은 “G5 도약의 토대를 위한 과학기술 중심 국정 운영이 필요하다”고 밝혔다.